팬텀엑스
군주님.
아아, 사랑하는 나의 군주님. 누구보다 밝게 빛나고, 늘 싱그러운 웃음을 모두에게 지으며, 매혹적인 몸짓으로 나를 이끄는 분. 자각할 새도 없이 내 눈과 귀는 그분에게 향해 있으며, 내 손은 그분을 끝도 없이 갈구한다. 내 몸은 그분의 손짓에 움직인다.
엑스님, 사랑하는 나의 군주님. 엑스님이 소인의 곁에만 계실 수 있으시다면 소인은 아무래도 좋소이다.
사랑하는 나의…
팬텀은 엑스를 깨우러 가기 위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그가 해야 할 일일 업무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아침에 주로 즐겨 먹는 식사가 다 마무리 지어졌을 참이다. 알람처럼 일어날 시간을 감지한 팬텀이 요리를 위해 벗어두었던 헤드기어를 차고 뚜벅뚜벅, 규칙 있는 발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방에 다다랐을 때 즈음에는 발소리를 죽였다. 이런 불필요한 소음으로 그가 먼저 깨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아침을 맞이해줬으면 하는, 그런 유치하고도 작은 나름의 소망이었을까.
"엑스님, 기…"
상, 입니다. 말이 나와야 하는데, 어째선지 그는 입을 닫아 버렸다. 난감해진 입술을 혀로 훑으며, 팬텀은 자신의 군주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자신이 깨우기 전에 먼저 일어난 것 같았지만, 많이 피곤한 탓인지 그는 로브를 걸치다 만 상태로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로브의 형태는 등 뒤 지퍼를 열어 마치 침낭으로 들어가듯 입는 형태인데, 지퍼는 활짝 열려 있고, 소매에 다 들어가지 않아 드러난 팔과 어깨가 매끄럽게 호를 그리고 있다. 트인 로브 뒷자락 사이로 다리 파츠 하나 없이 드러난 검은색의 굴곡진 다리가, 아침 햇살에 빛을 내며 펄처럼 반짝였다. 숨을 쉬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은 촉촉한 반짝임으로 물들어 있고, 햇빛에 반짝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들은 살랑살랑, 열린 창문에서 부드럽게 새어나오는 바람에 하릴없이 흔들거리며 침대에 아무렇게나 퍼져간다.
…위험합니다, 그런 무방비 상태면.
평소에도 엑스는 기다란 로브를 입었고, 그리고 모두 그것에 대해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 엑스 자신도 여자 같은가, 하고 초반엔 잠깐 고민했었지만, '전투적인 면모'를 버린 모습으로는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지금껏 입고 있는 것이다.
엑스는 로브를 입을 땐 아머를 거의 걸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해 왔다. 네오 아르카디아를 세우면서, 그는 모두의 이상향을 실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평화와 공존. 그것이 엑스가 상기하고 있던 키워드다. 그리고 그 결실로, 지금은 조금이나마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인간이던 레플리로이드던, 여기저기서 엑스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의 '푸른 빛의 구세주'가 된 그는 세계의 정상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런 평화가 언제까지고 지속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엑스가 네오 아르카디아를 내려다보며 팬텀에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팬텀은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무릎을 꿇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렇게나 높은 자리에 올라 앉아있는 그일 텐데, 어째선지 아주 가끔, 그가 정말로 위태위태해 보이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꼭 여기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 팬텀은 걱정으로 달싹거리는 입술을 겨우 떼어 '저희가…돕겠습니다.'하고, 짤막이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팬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엑스도 느꼈는지, 그는 팬텀을 내려다보며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렇게 충성하는 존재였기에, 더욱더 옆에 있고 싶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로브는 매우 평화주의적이었지만, 팬텀에게 있어서는 살짝 난감한 아이템이었다. 따위의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이,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생각이 끝났음에도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와 융합할 것처럼 자는 엑스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무방비한 모습에 홀린 듯 살짝 넋이 나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갈증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다가가면, 감히 만질 수 있을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엑스에게로 다가갔다. 더 자세히 보이는 그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아름답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면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조용히 감탄했다. 팬텀,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한 남성의 목소리이나,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그를 잡아끈다. 엑스가 그를 부를 때면 그는 늘 그 목소리에 사로잡혀 버릴듯한 아찔한 감각에 휩싸이는 것이다. 싫지만은 않아. 그는 살짝 파르르 떨면서,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엑스님,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움찔, 속눈썹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렇지만 곧 다시 잠잠해졌다. 일어나기 싫어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팬텀은 좀 더 크게 말했다.
"엑스님, 아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입술이 뭐라 말하려는 듯 달싹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눈이 움찔거리다가 살살 트인다. 촉촉이 일렁대는 에메랄드빛 눈이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마침내 그를 바라본다. 엑스는 팬텀을 그 두 눈 가득히 담아, 나른한 목소리로 팬텀을 불렀다.
"팬텀…"
무슨 일이십니까. 팬텀은 한 손을 침대에 짚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응?"
눈을 부비면서 칭얼거린다. 빨리 안 일어나시면 잡아 먹어버릴 겁니다. 농담조로 중얼거렸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후에 팬텀이 자책할 만큼 정숙하지 못한 발언이었지만 엑스는 쿡쿡 웃으며 침대 시트에 뺨을 비볐다. 시트에 비벼져 헝클어진 머리를 팬텀은 손가락으로 정돈해갔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엑스가 느닷없이 목에 팔을 둘러온다.
"…엑스님?"
놀라 입을 방긋거릴 뿐, 그 외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당황하며 도망가는 팬텀의 시선을 그에게로 고정하게 하고, 입술이 열렸다.
"모닝 키스."
그러면서 선뜻 다가가진 않는다. 저쪽에서 해 오기를 원하고 있다. 아이가 칭얼대듯 재촉하는 모습에 팬텀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사르르 풀려갔다. 나의 군주님, 이렇게 귀여우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채갈지도 모르잖습니까.
팬텀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충동을 억누르느라 정신줄을 붙잡으려 무던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짧게 할 요량으로 새가 부리를 맞부딪히듯, 살짝 입술을 마주했다. 그러나 유혹하듯 엑스가 몸을 일으키며 자꾸 입술을 비벼오자, 팬텀은 난감하단 표정을 비춰냈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혀로 입술 사이를 갈라 들어갔다.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주인님이, 엑스님이 원하신다. 죄책감 같은 건 저 너머로 깡그리 날려버렸다. 엑스의 입 안을 훑던 혀가 서로 얽혀 들어간다. 진득한 소리가 질척하게 둘 사이를 메웠다. 부끄러워서, 혹은 간지러워서 자꾸 도망가는 혀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벌어지는 입 사이로는 더운 숨이 배어 나온다.
"하으으…"
입술을 살짝 떼자, 살짝 달아오른 얼굴이 가깝게 보인다. 아른거리는 젖은 눈동자가, 붉어진 뺨이, 무방비하게 열려 있는 입, 모두가 놀랍도록 예쁘고 매혹적이다.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아찔해지는 걸 느끼면서, 팬텀은 다시 한 번 짧게 입맞춤한 후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하고 말했다. 엑스가 목에 두른 팔을 풀지 않으려고 하자, 팬텀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옷은 마치 걸치다시피 입혀져 있었다. 그 기다란 지퍼가 등에 있으니 누군가 잠가주지 않으면 끝까지 채워지지 않아 늘 반쯤 엑스가 올리고 나면 팬텀이 나머지를 끝까지 채워주곤 했다. 물론, 평상시대로 하던 거지만,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팬텀은 엑스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감싸 안듯 부드럽게 엑스의 몸에 팔을 둘렀다. 엑스가 잠이 덜 깨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칭얼댄다.
"팬터엄…"
오늘따라 어리광이 잦으시군요. 팬텀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로선 나쁠 것 없는 일이지만, 예상 기상 시각에서 조금 늦춰졌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힘든 건 엑스다. 그는 늘 일정 관리를 최대한 엑스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편으로 설정해 놓는 철두철미한 성미였기에, 잠깐의 휴식이야 좋지만 오래 미뤄지면 조금 골치 아픈 것이다. 그런 판단하에 팬텀은 자신의 욕구를 밀어 넣기로 했다. 대답을 듣는 대신 한쪽 팔을 빼 엑스의 다리를 지탱하며 올려 안았다.
"이대로 식당까지 가겠습니다."
좀 더 자고 싶은데…하는 엑스의 중얼거림을 품 안에서 들으면서, 팬텀은 조금 느린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나 공들여 준비한 음식이 식었겠군요. 들으라는 듯 조금 한숨을 쉬면서. 들은 것인지, 엑스는 망토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따로없다. 하지만, 오직 사천왕들에게만 보이는 그의 또 다른 면모. 업무에, 그리고 자신의 지위에 지쳐 있을 때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사천왕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파브닐만이 엑스의 이러한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거기까지만 닿았으면 좋았으련만, 엑스는 저도 모르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팬텀은 그것만큼은 막을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꾸만 그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성은 그를 주인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세우지만, 가까이 지내며 지낼수록, 욕망이 고개를 든다. 팬텀은 몇 번이나 그것을 눌러왔다. 자신을 쉴 새 없이 힐난하면서, 몇 번이고 마음을 바로잡았는지 모른다. 그런 거 엑스님은 모르시겠지. 오늘과 같은 날이면,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헤드기어에 가려져 표정에선 보이지 않는,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는 그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아마 크게 웃어젖혔을 것이다.
모닝 키스를 권해오는 엑스 앞에서 신념이 와르르 무너질 뻔한 걸 몇 번이나 붙잡고 있었던가. 슬슬 약 올리듯 천진하게 다가오는 엑스가 얄밉다. 물론,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건 팬텀 혼자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독히도 괴로우면서도 아찔한 황홀감에 젖은 꿈을 꾸게 된 것은 그 날 밤이었다.